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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뉴스

[ 선덕여왕 ] 미실이 버린 아이 비담

드라마 선덕여왕 에서 비담이란 인물로 김남길이 복귀한다.


영화 '미인도'와 '핸드폰' 등을 통해 개성 넘치는 연기를 보여온 배우 김남길이 MBC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2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다.


< 역사 속으로 >
비담의 난  비담은 (상대등출신)

                

비담의 난은 선덕여왕 때 상대등의 요직에 있던 비담이 ‘여왕폐위’의 기치를 내걸고 647년(선덕여왕 16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 이 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646년 11월에 상대등에 임명된 비담은 그 이듬해 정월 廉宗 등과 더불어 선덕여왕의 정치적 무능을 이유 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군은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명활산성에 진을 쳤고, 김유신이 이끄는 여왕의 군대는 첨성대 뒤편에 자리 잡은 반월성에 진을 친 채 10여 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큰 별이 반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은 “별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였으니 여왕이 패 할 징조다”라고 말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비담의 말을 들은 반군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승리감에 들떴다.


그러자 김유신은 여왕을 안심시키고 동요하는 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묘책을 짜냈다.

그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커다란 연에 매달아 허공에 날려 보냈다.

이는 연이 사용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튿날 동이 트자 김유신은 사람들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 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여왕의 군사는 사기가 올랐고 비담의 군사는 실망했다.

김유신은 백마를 잡아 제를 올린 뒤 군사를 휘몰아 반란군을 공격했다.

반란군은 패하고 비담은 사로잡혔다.


김유신은 비담 등 반란 주모자의 9족을 멸하는 극형을 내렸다.

이 비담의 난은 외형상 선덕왕의 폐위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신라 지배권력 내의 치열한 정치투쟁이었다.

반란의 주모자 비담은 권력의 중추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다.

그는 왕위계승자가 없으면 제1순위로 신라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였다.


당시 신라의 왕가에는
성골 출신의 남자가 없었고, 게다가 당태종이 여왕을 폐위하고 남자 왕을 옹립하라는 충고가 있은 후 알게 모르게 그러한 말이 화백회의 내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급 해진 것은 선덕여왕 보다도 새로이 권력층에 편입된 김춘추 와
가야출신이라는 태생적 결함을 지닌 김유신 이었다.

실제로 비담 등이 주도한 화백회의가 열려 선덕여왕의 폐위를 결의한 직후 반란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비담측이 아닌 선덕여왕 측으로 뒤바뀐다.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추리는 아니다.

당태종이 신라조정에 선덕여왕 폐위를 충고한 시기가 643년이었다.

당나라의 의견을 놓고 신라조정은 암투를 벌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645년 11월 비담이 상대등에 오름으로써 일단

여왕 폐위파가 대세를 장악했다.

비담 파는 여세를 몰아 화백회의를 통한 합법적인 여왕폐위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 외교와 군사 면에서 실력자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두 세력의 충돌이 비담의 난으로 나타났다.

이 내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에 이어 진덕 이란 여성이 신라왕으로 옹립된 것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들의 정적을 비롯하여 그 정적을 부추기는 당나라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지의 천명이었다.


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여 삼국통일의 쌍두마차가 된다.


출처 : http://tvzonebbs.media.daum.net/griffin/do/talk/program/seonduk/read?bbsId=340_a&articleId=203&pageIndex=3&searchKey=&searchValue=